조지 베스트 (George Best) – FW, 북아일랜드

'다섯 번째 비틀즈'라 불린 비운의 천재, 조지 베스트의 모든 것을 알아봅니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신성 삼위일체'를 이끌고 1968년 발롱도르를 수상한 그의 눈부신 전성기를 확인하세요


북아일랜드의 마법사, 축구장을 춤추게 한 전설


조지 베스트  – FW, 북아일랜드



  • 전체 이름: 조지 베스트 (George Best)

  • 국적: 북아일랜드

  • 포지션: 윙어 (Winger), 공격형 미드필더 (AM)

  • 별명: 다섯 번째 비틀즈 (The Fifth Beatle), El Beatle (엘 비틀)


선수 경력 (주요 클럽)

  •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1963-1974)

  • 풀럼 FC (1976-1977)

  • 로스앤젤레스 아즈텍스 (1976, 1977-1978)

  • 산호세 어스퀘이크스 (1980-1981)

    •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떠난 후에는 여러 클럽을 거쳤다.


플레이 스타일 요약

  • '다섯 번째 비틀즈'라 불린, 축구 역사상 최초의 '슈퍼스타'이자 최고의 드리블러 중 한 명이다.

  • 경이로운 밸런스와 민첩성, 양발을 자유자재로 사용하는 기술을 바탕으로 수비수 여러 명을 쉽게 제압하는 드리블의 마술사였다.

  • 윙어임에도 불구하고 폭발적인 득점력을 겸비했으며, 골과 어시스트 모두에 능했던 완성형 공격수였다.

  • 보비 찰튼, 데니스 로와 함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전성기를 이끈 '신성 삼위일체(The Holy Trinity)'의 핵심 멤버였다.


핵심 커리어 하이라이트

  • 1968년 발롱도르 수상: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유러피언컵 우승을 이끈 압도적인 활약으로 유럽 최고의 선수로 선정되었다.

  • 1968년 유러피언컵 우승: 벤피카와의 결승전 연장전에서 수비진을 무너뜨리는 환상적인 결승골을 터뜨리며, 뮌헨 비행기 참사의 아픔을 겪었던 팀에 사상 첫 유러피언컵을 안겼다.

  • 방탕한 천재의 아이콘: 뛰어난 실력만큼이나 화려한 여성 편력과 음주 등 방탕한 사생활로 유명했으며, 이로 인해 27세라는 이른 나이에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떠나며 전성기가 매우 짧았다.

  • 불멸의 명언: "나는 내 돈의 대부분을 술, 여자, 그리고 빠른 차에 썼다. 나머지는 그냥 낭비했다 (I spent a lot of money on booze, birds and fast cars. The rest I just squandered.)"는 그의 명언은 여전히 회자된다.

 

  "펠레는 좋은 선수, 마라도나는 더 좋은 선수, 조지 베스트(Best)는 최고의 선수다(Pelé good, Maradona better, George Best)." 축구계에 전해지는 이 유명한 문장은 한 선수의 경이로운 재능을 상징한다. 조지 베스트는 축구 역사상 최초의 '셀러브리티 슈퍼스타'이자, 비틀즈의 인기에 버금간다 하여 '다섯 번째 비틀즈(The Fifth Beatle)'라 불렸던 그라운드의 아이돌이었다. 하지만 그의 눈부신 재능 뒤에는 스스로를 파괴한 비극적인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다.




벨파스트에서 온 천재 소년

  북아일랜드 벨파스트에서 태어난 조지 베스트의 재능은 일찍부터 발견되었다. 당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스카우트였던 밥 비숍은 15세 소년의 플레이를 본 후, 맷 버즈비 감독에게 "감독님, 제가 천재를 한 명 찾아낸 것 같습니다(I think I've found you a genius)"라는 역사적인 전보를 보냈다. 이 전보 한 통으로 맨체스터에 입성한 베스트는 17세에 1군 무대에 데뷔하며 올드 트래포드의 새로운 전설이 될 준비를 마쳤다.


맨체스터의 신성 삼위일체 (The Holy Trinity)

  조지 베스트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전설적인 공격 라인을 구축했다. 잉글랜드의 상징인 보비 찰튼(Bobby Charlton), 스코틀랜드 최고의 골잡이 데니스 로(Denis Law), 그리고 북아일랜드의 천재 조지 베스트로 이어진 이 공격진은 '신성 삼위일체(The Holy Trinity)'라 불렸다. 이 세 명은 각기 다른 개성과 스타일로 완벽한 조화를 이루었고, 모두 발롱도르를 수상하는 위업을 달성하며 1960년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황금기를 이끌었다.


1968년, 영광의 정점에 서다

  조지 베스트 커리어의 정점은 단연 1967-68시즌이었다. 그는 이 시즌에 리그에서만 28골을 터뜨리며 득점왕에 올랐고, 팀을 잉글랜드 리그 우승으로 이끌었다. 하이라이트는 유러피언컵(現 챔피언스리그)이었다. 뮌헨 비행기 참사의 비극을 딛고 10년 만에 결승에 오른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는 포르투갈의 강호 벤피카를 만났다. 연장전에서 그는 환상적인 드리블로 골키퍼까지 제치고 결승골을 터뜨리며, 잉글랜드 클럽 최초의 유러피언컵 우승이라는 위업을 달성했다.

이 해에 그는 최고의 활약을 인정받아 축구 선수 최고의 영예인 발롱도르를 수상하며 22세의 나이에 유럽 최고의 선수로 공식 인정받았다.


축구계를 떠난 슈퍼스타, 그리고 방황

  그라운드 위에서의 성공은 그를 축구장을 넘어선 시대의 아이콘으로 만들었다. 하지만 감당하기 힘든 인기와 압박감은 그를 술과 여자, 그리고 방탕한 생활로 이끌었다. 그는 훈련에 불참하기 일쑤였고, 알코올 중독은 그의 재능을 빠르게 갉아먹었다.

그는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을 남기기도 했다. "나는 내 돈의 대부분을 술, 여자, 그리고 빠른 차에 썼다. 나머지는 그냥 낭비했을 뿐이다(I spent a lot of money on booze, birds and fast cars. The rest I just squandered)."

결국 그는 1974년, 불과 27세의 나이에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돌연 계약을 해지하며 최상위 무대에서 사실상 은퇴했다. 이후 여러 하부 리그와 미국 등지를 떠돌았지만, 맨체스터 시절의 천재적인 모습은 다시 보여주지 못했다.


시대를 앞서간 플레이 스타일

  조지 베스트는 현대적인 윙어의 원형과도 같은 선수였다. 그는 폭발적인 스피드, 경이로운 균형 감각, 그리고 양발을 자유자재로 사용하는 드리블의 대가였다. 여러 명의 수비수를 달고 다니면서도 공을 뺏기지 않았고, 예측 불가능한 플레이로 팬들을 열광시켰다. 그는 단순한 윙어를 넘어, 득점력까지 겸비한 완성형 공격수였다.

결론적으로 조지 베스트는 축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재능을 가졌던 선수 중 한 명이자, 동시에 자기 관리의 실패가 천재를 어떻게 무너뜨리는지를 보여주는 가장 대표적인 사례이다. 그의 축구는 너무나도 눈부셨기에, 너무 일찍 져버린 그의 재능은 오늘날까지도 수많은 축구 팬들에게 깊은 아쉬움과 그리움으로 남아있다.




주요 업적 및 수상 내역

  • 발롱도르 1회 (1968)

  • 유러피언컵(챔피언스리그) 우승 1회 (1967-68)

  • 잉글랜드 1부 리그 우승 2회 (1964-65, 1966-67)

  • FWA(축구기자협회) 올해의 선수 1회 (1968)

  • 풋볼 리그 1부 득점왕 1회 (1967-68)

  • PFA 공로상 (2006)

  • FIFA 100인 선정

  • UEFA 주빌리 어워드 수상 (북아일랜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