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셸 플라티니 (Michel Platini) – MF, 프랑스

중원의 마스터플래너, 미셸 플라티니의 모든 것을 알아봅니다. 유벤투스 소속으로 전무후무한 발롱도르 3연패를 달성하고, 유로 1984에서 프랑스를 정상으로 이끈 그의 지능적인 플레이메이킹과 축구 철학을 확인하세요.

 축구를 설계한 중원의 천재, 미셸 플라티니


미셸 플라티니 – MF, 프랑스


기본 정보

  • 전체 이름: 미셸 프랑수아 플라티니 (Michel François Platini)

  • 국적: 프랑스

  • 포지션: 공격형 미드필더 (AM)

  • 별명: Le Roi (르 루아, 왕)


선수 경력 (주요 클럽)

  • AS 낭시 (1972-1979)

  • AS 생테티엔 (1979-1982)

  • 유벤투스 FC (1982-1987)


플레이 스타일 요약

  • '미드필더는 골을 넣을 수 없다'는 편견을 깬, 역사상 가장 위대한 골 넣는 미드필더 중 한 명이다.

  • 뛰어난 축구 지능과 넓은 시야, 정확하고 창의적인 패스 능력을 바탕으로 경기를 지휘하는 '그라운드의 사령관'이었다.

  • 예술의 경지에 오른 프리킥 능력은 그의 트레이드마크였으며, 어떤 위치에서든 득점을 만들어냈다.

  • 지레스, 티가나 등과 함께 구축한 프랑스 대표팀의 '매직 스퀘어(Carré Magique)' 중원의 핵심이었다.


핵심 커리어 하이라이트

  • 발롱도르 3회 연속 수상 (1983, 1984, 1985): 축구 역사상 최초로 3년 연속 발롱도르를 수상하며 80년대 중반을 완벽하게 지배했다.

  • UEFA 유로 1984 우승: 단일 대회에서 9골(2번의 해트트릭 포함)을 기록하는 압도적인 퍼포먼스로 프랑스에 사상 첫 메이저 대회 우승을 안긴 국민적 영웅이다.

  • 유벤투스의 전성기: 이탈리아 세리에 A에서 미드필더임에도 3회 연속 득점왕을 차지하는 기염을 토했으며, 팀에 유러피언컵 우승(1985)과 2번의 리그 우승을 이끌었다.

  • 선수와 감독으로 모두 성공: 선수 은퇴 후 프랑스 국가대표팀 감독을 역임했으며, 이후 행정가로 변신했다.


행정가 경력 및 논란

  • 선수 은퇴 후 UEFA(유럽 축구 연맹) 회장직(2007-2015)을 역임하며 축구계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 하지만 2015년, FIFA 비리 스캔들에 연루되어 8년간의 자격 정지 징계를 받고 불명예스럽게 물러나며 그의 명성에 큰 오점을 남겼다.


  1980년대 세계 축구를 지배한 중원의 '왕(Le Roi)'이자 '장군'이었다. 그는 폭발적인 스피드나 강력한 피지컬이 아닌, 그라운드 전체를 읽는 천재적인 지능과 예술적인 패스로 경기를 지배했다. 미셸 플라티니는 3회 연속 발롱도르 수상이라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운 선수이자, 프랑스 축구에 사상 첫 메이저 트로피를 안긴 불세출의 영웅이다. 하지만 선수로서의 완벽한 명성과 달리, 행정가로서의 말년은 오점으로 얼룩지며 그의 유산에 복합적인 평가를 남겼다.




프랑스의 새로운 '왕'

  프랑스 로렌 지방의 작은 도시에서 태어난 플라티니는 AS 낭시와 AS 생테티엔에서 뛰며 프랑스 리그 최고의 스타로 성장했다. 그는 일찍부터 '프리킥의 마법사'로 명성을 떨쳤으며, 미드필더임에도 불구하고 탁월한 득점력을 과시했다. 그의 활약은 당시 세계 최고 리그였던 이탈리아 세리에 A의 주목을 받기에 충분했다.



유벤투스, '장군'의 시대를 맞다 (1982-1987)

  1982년, 플라티니는 이탈리아의 명문 유벤투스로 이적하며 자신의 전성기를 열었다. 수비적인 이탈리아 축구 속에서 그의 창의성과 공격 본능은 단연 돋보였다. 그는 팀의 공격을 지휘하는 '장군'으로서 유벤투스를 두 번의 세리에 A 우승(1983-84, 1985-86)으로 이끌었고, 미드필더임에도 불구하고 세리에 A 득점왕(카포칸노니에레)을 3회 연속(1983-1985) 차지하는 경이로운 기록을 세웠다.

이 시기 플라티니는 세계 최고의 선수였다. 그는 1983년부터 1985년까지, 축구 선수 최고의 영예인 발롱도르를 3회 연속 수상했다. 이 기록은 요한 크루이프조차 달성하지 못한 대기록으로, 80년대가 완벽하게 그의 시대였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레블뢰 군단의 심장, '마법의 사중주'

플라티니는 프랑스 대표팀(Les Bleus)의 심장이었다. 그는 알랭 지레스, 장 티가나, 루이스 페르난데스와 함께 역사상 가장 아름답고 창의적인 미드필드 라인으로 평가받는 '마법의 사중주(Le Carré Magique)'를 결성했다. 이들이 펼치는 예술적인 '아트 사커'는 프랑스를 세계적인 강팀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비록 1982년과 1986년 월드컵에서는 4강에서 서독에 패하며 눈물을 흘렸지만, 이들이 보여준 축구는 전 세계 팬들을 매료시켰다.



영광과 비극: 유로 1984와 헤이젤 참사

  플라티니 커리어의 정점은 안방에서 열린 유로 1984였다. 그는 이 대회에서 주장으로서 5경기 9골이라는 믿을 수 없는 득점력으로 프랑스의 사상 첫 메이저 대회 우승을 이끌었다. 한 대회 9골 기록은 현재까지도 깨지지 않는 불멸의 기록으로 남아있다.

하지만 이듬해인 1985년, 유러피언컵 결승전에서는 그의 축구 인생에 가장 큰 비극인 '헤이젤 참사' 가 발생했다. 리버풀 팬들의 난동으로 경기장 벽이 무너져 39명의 관중이 사망하는 끔찍한 사건이었다. 경기는 강행되었고, 플라티니는 페널티킥 결승골을 넣어 팀에 우승컵을 안겼지만, 그날의 우승은 영광이 아닌 깊은 상처로 남았다.



선수 이후의 삶: 권력과 몰락

  선수 은퇴 후, 플라티니는 프랑스 대표팀 감독을 거쳐 행정가로 변신했다. 그는 뛰어난 수완을 발휘하여 유럽 축구 연맹(UEFA)의 회장 자리에까지 올랐고, 한때 FIFA 회장직의 가장 유력한 후보로 꼽혔다. 하지만 2015년, 제프 블라터 당시 FIFA 회장으로부터 명목 없는 거액의 자금을 수수한 혐의(일명 'disloyal payment')가 드러나면서 축구계에서 퇴출당하는 불명예를 안았다. '왕'이라 불렸던 천재의 명성은 심각하게 훼손되었다.



지능으로 그라운드를 지배한 아티스트

  플라티니는 신체 능력으로 상대를 압도하는 선수가 아니었다. 그는 경기의 흐름을 완벽하게 읽는 축구 지능, 수비 라인을 단번에 무너뜨리는 킬러 패스, 그리고 예술적인 프리킥으로 그라운드를 지배한 아티스트였다. 그는 공격형 미드필더, 즉 '10번' 포지션이 어떻게 경기를 운영해야 하는지에 대한 완벽한 해답을 제시한 선수였다.

결론적으로 미셸 플라티니는 80년대를 대표하는 완벽한 축구 천재였다. 그러나 선수로서 쌓아 올린 위대한 업적과 명성은 행정가 시절의 과오로 인해 빛이 바랜 것이 사실이다. 그는 축구 팬들에게 천재가 보여줄 수 있는 최고의 경지와 함께, 권력의 허무함을 동시에 보여준 문제적 인물로 기억된다.




주요 업적 및 수상 내역

  • 발롱도르 3회 (1983, 1984, 1985) - 3회 연속 수상

  • UEFA 유럽 축구 선수권 대회(유로) 우승 1회 (1984)

  • 유로 1984 MVP 및 득점왕 (9골)

  • 유러피언컵(챔피언스리그) 우승 1회 (1984-85)

  • 이탈리아 세리에 A 우승 2회 (1983-84, 1985-86)

  • 세리에 A 득점왕(카포칸노니에레) 3회 (1983, 1984, 1985)

  • 프랑스 리그 1 우승 1회 (1980-81)

  • 쿠프 드 프랑스 우승 1회 (1977-78)

  • FIFA 월드컵 3위 1회 (1986)

  • 월드 사커 선정 올해의 선수 2회 (1984, 1985)